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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주니어였던 2001년 즈음에는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수들을 가까이에서 만날 수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온라인 서비스 기획이라는 역할이 아직 명확하게 정립되지 않았고,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이 기획자로 전환해 함께 일하던 시기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단순히 화면을 설계하고 요구사항을 정리하는 ‘기획 실무 스킬’이 아니라, 기획자로서 성장의 바탕이 되는 중요한 기반 능력들을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천운을 타고났다고 생각이 들지만.. 당시엔...

 

삼성의 마케팅 기획자 출신 사수에게는 상황을 구조적으로 바라보며 생각하는 방법을 배웠고, 보스턴컨설팅 출신의 전략 기획자 사수에게는 타인의 의도와 맥락을 정확하게 읽어내는 해석력을 배웠습니다. 제일기획에서 광고기획을 하던 사수에게서는 제 생각을 조리 있게 정리해 말하는 법을 배웠고, 엠브레인의 리서치 기획자 출신 사수에게는 막연한 아이디어를 현실적인 기획으로 구체화하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 분야에서 온 사수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기반 능력을 전수해주었기에, 저는 단순히 ‘일을 처리하는 기획자’가 아니라 ‘생각하는 기획자’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이런 기반 능력을 자연스럽게 배울 기회가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현장에는 빠르게 실무만 요구되고, 조직에서는 즉시 투입 가능한 스킬만을 강조하다 보니, 정작 기획자의 성장을 결정하는 기초 체력 -말하기, 이해하기, 설득하기, 구조화하기 같은 기반 능력-을 가르쳐주는 환경이 거의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날의 주니어 기획자들이 더욱더 ‘기본기’를 키워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글에서는 제가 25년간 직접 경험하며 깨달은, 주니어가 먼저 갖춰야 할 기반 능력들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1. 왜 주니어 기획자에게 ‘스킬’보다 ‘기반 능력’이 먼저인가?

스킬은 금방 바뀌지만, 기반 능력은 커리어 내내 남는다

많은 주니어 기획자들이 처음 일을 시작할 때 가장 먼저 배우고 싶어 하는 것은 도구와 실무 스킬입니다. Figma를 얼마나 다룰 줄 아는지, 화면 설계를 얼마나 깔끔하게 하는지, 요구사항 문서를 얼마나 빠르게 작성하는지가 실력의 기준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물론 이런 기술적 요소들은 기획자로 일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능력입니다. 하지만 25년 동안 다양한 조직과 프로젝트를 경험하며 느낀 점은, 스킬은 ‘기획자다움’을 만드는 핵심 요소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스킬은 빠르게 배울 수 있지만, 스킬만으로는 좋은 기획자가 될 수 없습니다.

 

이유는 명확합니다. 기획의 본질은 생각을 전달하고, 의도를 파악하고, 문제의 맥락을 해석하며, 사람들을 움직이게 만드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이 과정은 단순히 도구를 잘 사용한다고 해결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말하기, 글쓰기, 이해력, 구조화 능력, 대화의 기술 같은 기반 능력이 갖춰져야 스킬이 제대로 의미를 갖게 됩니다. 기반 능력 없이 스킬만 빠르게 쌓는 것은 모래 위에 건물을 짓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AI 시대에서 기획자가 살아남는 방법을 기본을 익히는 겁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스킬은 바뀌지만 기반 능력은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주니어였던 2001년과 지금을 비교해보면, 도구와 프로세스는 세월이 지나며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당시에는 파워포인트, 워드, 플로우 차트 정도가 기획자의 주요 도구였고, 협업 방식도 지금처럼 실시간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반면 요즘은 Figma, Notion, Miro, Jira 등 새로운 툴이 수시로 등장하고, 협업 방식도 끊임없이 진화하고 있습니다. 이런 변화 속에서 어떤 스킬을 익혔는지는 시간이 지나면 금방 의미를 잃습니다.

 

하지만 기반 능력은 다릅니다. 상황을 구조적으로 바라보고, 상대의 의도를 해석하고, 명확하게 말하고 쓰고, 문제를 정의하는 능력은 시대가 바뀌어도 기획자의 본질적인 경쟁력으로 남습니다. 그리고 이 능력들은 한 번 익혀두면 어떤 도구가 등장해도 그 위에 스킬을 쌓아 빠르게 적응할 수 있는 기반이 됩니다.

 

또한 주니어 시절에 스킬만 강조하면 성장이 특정 역할에 갇히기 쉽습니다. 화면 설계만 잘하는 기획자, 프로세스만 잘 그리는 기획자, 요구사항 정리만 잘하는 기획자는 조직 내에서 역할은 있을 수 있지만, 성장에 한계가 생기기 마련입니다. 반면 기반 능력이 갖춰진 기획자는 자연스럽게 더 복잡한 문제를 맡고, 더 중요한 결정을 담당하며, 더 높은 수준의 기획자로 성장하게 됩니다. 기획자의 레벨을 결정하는 것은 스킬의 깊이가 아니라 기반 능력의 폭과 밀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니어 시절에는 스킬이 성장을 가장 빠르게 도와줄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기반 능력이 기획자의 성장을 장기적으로 지탱해주는 가장 중요한 자산입니다. 스킬은 특정 시점의 과제를 해결해주지만, 기반 능력은 커리어 전체를 끌어올립니다. 그래서 저는 주니어일수록 단기적인 성과 대신 기반 능력에 더 집중하길 권합니다. 그 기반 위에 어떤 스킬이든 시간이 지나며 자연스럽게 쌓여가기 때문입니다.

2. 빠르게 성장하는 주니어의 공통점: 생각을 구조화하는 힘

성장은 ‘생각을 구조화하는 능력’에서 시작된다

제가 다양한 조직에서 주니어 기획자들을 만나며 느낀 점은, 성장 속도는 결국 ‘생각을 구조화하는 능력’에서 갈린다는 것입니다. 어떤 주니어는 입사한 지 1~2년 만에 중급 이상의 역할을 자연스럽게 수행하고, 어떤 주니어는 여러 해가 지나도 여전히 같은 수준에서 반복되는 실수를 경험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를 스킬의 차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그 격차를 만드는 요인은 스킬이 아니라 생각을 다루는 방식의 차이입니다.

 

기획자는 매일 새로운 문제를 맞닥뜨립니다. 요구사항이 바뀌고, 제약이 생기고, 일정이 밀리고, 각 팀의 입장이 충돌하는 상황이 끊임없이 발생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구조적으로 사고하지 못하면 문제를 단편적으로만 바라보게 되고, 결국 대응도 임시방편으로 끝날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 생각을 구조화하는 능력이 있는 사람은 문제를 ‘전체적인 흐름’ 속에서 바라보고, 어떤 지점이 핵심인지 빠르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더 정확한 판단을 내리게 되고, 그 결과 업무 속도도 빨라지고 완성도도 높아집니다.

 

구조화를 잘하는 것은 상황을 빠르게 판단하고 우선순위를 정리하는데 큰 도움이 됩니다.

 

구조화 능력의 핵심은 복잡한 문제를 단순하게 재정리하는 힘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의 기능 개선 요청이 들어왔을 때 단순히 화면에 요소를 추가하는 것이 아니라, “이 문제의 본질이 무엇인지”, “해결해야 할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현재 흐름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를 먼저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기능 단위가 아니라 ‘관계’와 ‘흐름’으로 사고하게 되면 문제 자체를 다루는 깊이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이것이 바로 기획자의 사고체계가 만들어지는 과정입니다.

 

또한 구조화 능력은 커뮤니케이션의 질도 결정합니다. 회의에서 구조적으로 말하는 기획자와 그렇지 못한 기획자는 팀 내에서의 신뢰도에서 큰 차이가 납니다. 구조적 사고가 익숙한 사람은 우선 정보를 정리하고, 논점을 구분하고, 결론을 명확하게 전달합니다. 반면 구조화가 안 된 상태에서는 말이 길어지고, 설명이 중간에 엉키고, 듣는 사람에게 불필요한 해석을 요구하게 됩니다. 이 차이는 기획자에게 치명적입니다. 기획자의 설득력, 영향력, 신뢰도 모두 구조화 능력에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생각의 구조화는 타고나는 능력이 아니라 훈련을 통해 얼마든지 키울 수 있는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문제를 쪼개고, 다시 묶고, 핵심을 추출하는 과정은 반복할수록 익숙해지고 정교해집니다. 실제로 실무에서 뛰어난 기획자들은 대부분 스스로 사고의 구조를 만들고, 이를 문서나 화이트보드에 시각적으로 정리하며 일합니다. 이 습관이 쌓이면 복잡한 프로젝트에서도 흔들림 없이 흐름을 유지할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결국, 생각을 구조화하는 능력은 기획자의 ‘업무 방식’을 바꾸고, 나아가 ‘문제를 보는 관점’을 바꾸는 능력입니다. 이것이 갖춰진 주니어는 어떤 스킬이든 훨씬 빠르게 습득할 수 있고, 더 중요한 역할을 자연스럽게 맡게 됩니다. 기획자로 빠르게 성장하고 싶다면 스킬보다 먼저 자신의 사고방식을 다듬는 데 시간을 투자해야 합니다. 구조화 능력은 단순한 사고 기술이 아니라 기획자로서의 성장 속도를 결정짓는 가장 강력한 기반 역량이기 때문입니다.

3. 조리 있게 말하는 능력이 기획자의 핵심 무기가 되는 이유

말을 정리하면 생각도 정리되고, 기획의 품질도 상승한다

기획자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자신의 생각을 설명해야 합니다. 개발자에게 요청사항을 설명하고, 디자이너에게 컨셉을 공유하고, 운영팀과 정책을 논의하고, PM이나 리더에게 방향을 보고하는 일이 반복됩니다. 이 과정에서 말을 정리해서 명확하게 전달하는 능력은 선택이 아니라 생존에 가까운 역량입니다. 하지만 많은 주니어 기획자들은 기획서만 잘 작성하면 된다고 생각하며 ‘말하기 능력’의 중요성을 간과하곤 합니다. 실제 현장에서는 기획서보다 말 한마디가 더 많은 영향을 끼칠 때가 훨씬 많습니다.

 

조리 있는 말하기가 중요한 이유는, 기획의 특성 때문입니다. 기획은 단순히 혼자서 문서를 만드는 작업이 아니라 여러 사람의 이해와 협조 속에서 움직이는 협업 기반의 업무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아이디어나 기획안이 있더라도, 이를 상대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거나 이해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면 실무에서는 ‘좋은 기획’이 되기 어렵습니다. 반대로 간단한 기능이라도 명확하고 논리적으로 말할 수 있다면 그 기획은 빠르게 정리되고 바로 실행으로 이어집니다.

 

누군가의 앞에서 내 생각을 조리있게 말하는 일, 쉬운 일이 아닙니다.

 

또한 조리 있게 말하는 능력은 기획자의 사고 수준을 그대로 드러내는 지표이기도 합니다. 말이 정리되지 않는다는 것은 생각이 정리되어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생각이 정리되어 있지 않으면 기획의 방향성도 흐트러지고, 논리도 흔들리고, 최종 결과물도 불안정해집니다. 그래서 선배 기획자들은 회의 자리에서 주니어의 말을 듣고 그 사람의 사고 구조를 바로 파악하곤 합니다. 결국 말하기 능력은 단순한 표현 방식이 아니라 기획자의 사고 깊이를 보여주는 ‘거울’입니다.

 

좋은 말하기는 복잡한 내용을 단순하게 설명하는 능력에서 시작됩니다. 문제를 먼저 요약하고, 핵심을 먼저 말하고, 결론과 이유를 구조적으로 정리하는 습관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이 기능을 추가해야 합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현재 사용자 흐름에서 이탈이 발생하는 지점이 있고, 이를 해소하기 위해 이 기능이 필요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듣는 사람의 이해도에서 큰 차이를 만듭니다. 기획자는 항상 상대의 시간을 절약하고, 논점을 빠르게 전달하며, 불필요한 해석을 요구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것이 곧 ‘조리 있게 말하는 능력’의 핵심입니다.

 

또한 말하기 능력은 협업 분위기에도 큰 영향을 미칩니다. 명확하게 설명하는 사람은 상대에게 신뢰를 주고, 불필요한 오해를 줄이며, 회의나 논의를 더 효율적으로 만들어줍니다. 반면 말이 장황하거나 핵심이 없으면 팀 내 소통 비용이 늘어나고, 회의가 길어지며, 결정이 늦어지는 결과를 낳습니다. 일정이 촉박한 프로젝트에서는 이런 차이가 누적되면 결과물의 질과 일정 모두에 큰 영향을 줍니다. 그래서 뛰어난 기획자일수록 말하는 방식을 꾸준히 점검하고 개선하는 데 시간을 투자합니다.

 

다행히 조리 있는 말하기는 타고나는 능력이 아니라 훈련을 통해 충분히 발전할 수 있는 기술입니다. 회의 전에 핵심 메시지를 정리하거나, 설명할 내용을 세 단계로 단순화하거나, 상대의 이해를 확인하며 말하는 습관을 들이면 점차 말하기의 구조가 단단해집니다. 결국 기획자의 말하기 능력은 업무 효율뿐 아니라 협업의 질, 나아가 조직에서의 신뢰도까지 좌우하는 중요한 기반 역량입니다.

 

기획자로 빠르게 성장하고 싶다면, 스킬뿐 아니라 ‘말하는 방식’을 반드시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조리 있게 말하는 능력은 단순한 전달력이 아니라, 기획자의 신뢰도와 영향력을 결정짓는 가장 강력한 무기이기 때문입니다.


1편에서는 주니어 기획자가 가장 먼저 갖춰야 할 기반 능력 중에서도 특히 중요한 세 가지, 즉 스킬보다 기반 능력이 먼저인 이유, 생각을 구조화하는 힘, 조리 있게 말하는 능력을 중심으로 이야기했습니다. 이 세 가지는 기획자의 성장을 결정짓는 토대이자, 이후 어떤 역량을 쌓더라도 흔들리지 않는 기초 체력입니다. 특히 스킬보다 기반 능력이 중요한 이유는, 스킬은 시대와 도구의 흐름에 따라 언제든 달라질 수 있지만 기반 능력은 어떤 환경에서도 변하지 않는 경쟁력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생각을 구조화하는 힘은 문제를 바라보는 시야를 넓혀주고, 조리 있게 말하는 능력은 기획자의 사고를 그대로 드러내며 협업의 질을 결정짓습니다. 이 세 가지가 단단하게 자리 잡아야 기획자로서 다음 단계를 보다 안정적으로 밟아갈 수 있습니다.

 

2편에서는 이러한 기반 위에 놓이는 또 다른 핵심 능력들을 다룰 예정입니다. 바로 상대의 의도를 정확히 읽어내는 해석력, 글쓰기 능력이 만드는 협업의 품질, 대화를 통해 문제를 드러내고 합의를 이끌어내는 기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기획자는 사람을 통해 일하는 직무이기 때문에, 생각을 정리하는 것만큼이나 상대의 말 뒤에 숨은 맥락을 이해하고, 글과 대화를 통해 관계를 조율하는 능력이 중요합니다. 다음 편에서는 실제 실무에서 이 능력들이 어떻게 활용되고, 왜 주니어 시절부터 반드시 훈련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려 합니다. 이어질 내용을 통해 기획자의 기반 역량이 어떻게 서로 연결되고 확장되는지 더욱 선명하게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온라인 공간에서 야메군이란 닉네임으로 활동 중인 25년 차 서비스 기획자. 네이버 웹/모바일 기획자 커뮤니티 웹(WWW)을 만드는 사람들에서 운영진으로 활동했으며, 딴지일보를 시작으로 아이러브스쿨, 메가엔터프라이즈, 짱공유닷컴, YES24를 거쳐 IT 원천기술 연구소 Valhalla Lab에서 Pattern recognition과 Machine learning 기반의 Natural language processing 기술의 상업적 이용방법에 대한 연구. 최근 스타트업계로 이직, 반려동물과 온라인 피트니스 분야를 경험했고 자율주행 도메인을 거쳐 현재 SaaS 기반 Monitoring 도메인에서 유일한 기획자로 재직 중. 2016년 7월, 웹/모바일 기획자의 업무능력 향상을 위한 서적 “처음부터 다시 배우는 웹 기획”(정재용, 최준호, 조영수 공저) 출간. 2008년부터 약 15년간 서비스기획자의 성장을 위한 온/오프 강의를 통해 후배 기획자를 양성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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