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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의 변화 때문일까요? 아니면 개인이 추구하는 가치관과 일하는 방식이 달라졌기 때문일까요? 혹은 실무를 옆에서 바로잡아줄 사수의 부재 때문일까요? 정확한 원인은 단정할 수 없지만, 분명한 사실은 언제부터인가 ‘조직에 소속된 기획자의 역할’을 근본적으로 잘못 이해하는 경우가 많아졌다는 점입니다. 많은 주니어 기획자들이 기획자를 ‘서비스 방향을 결정하는 사람’, ‘대표의 판단을 교정하는 사람’으로 오해하고, 심지어 대표와 다른 의견을 주장하는 것이 능력의 증명이라고 믿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인식은 실제 조직에서의 기획자 역할과는 큰 괴리가 있습니다. 기획자는 의사결정권자가 아니라, 방향성을 구조화하고 실행력을 만드는 전문가입니다. 이 역할을 이해하지 못하면 기획자는 대표와 끝없는 설득 싸움을 벌이게 되고, 본연의 기획 업무는 흐려집니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왜 기획자는 대표를 설득하려 해선 안 되는지, 그리고 기획자가 어떤 방식으로 대표와 협력해야 조직이 제대로 굴러가는지를 4회에 걸쳐 체계적으로 정리해보려 합니다.


1. 기획자들이 흔히 빠지는 ‘대표 설득’의 함정

기획 강의를 하다 보면 가장 자주 등장하는 질문 중 하나가 바로 “대표를 어떻게 설득할 수 있을까요?”입니다. 겉으로 보기엔 자연스럽고 실무적인 질문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 질문 속에는 기획자 역할에 대한 근본적인 오해가 섞여 있습니다. 기획자가 대표를 설득해야 한다고 믿는 순간, 일의 본질은 흐려지고 조직 내 권한 관계도 어긋나기 시작합니다.

 

 

결국 ‘설득’은 기획자의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되는 영역인데, 많은 주니어들이 이 부분에서 길을 잃곤 합니다. 이 글은 ‘대표 설득’이라는 단어가 왜 기획자를 위험한 길로 이끄는지, 그리고 기획자가 어떤 방식으로 사고해야 현실에서 훨씬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는지를 짚어보려는 목적에서 시작합니다. 기획자의 역할을 다시 바라보는 작은 관점 전환이, 실무에서는 surprisingly 큰 차이를 만들어 냅니다.

 

1-1. 기획 강의 16년 동안 반복적으로 등장한 질문

기획 강의를 16년 넘게 진행하면서 수많은 실무자와 예비 기획자를 만났습니다. 다양한 산업과 회사 규모에서 온 사람들이었지만, 신기하게도 어떤 배경을 가지고 있든 거의 빠짐없이 등장하는 질문이 있었습니다. 바로 “대표를 어떻게 설득할 수 있나요?”라는 질문입니다. 기획자의 고민이 아주 다양해 보이지만, 깊이 들어가 보면 대부분의 문제는 이 질문으로 귀결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기능을 넣어야 하는지, 어떤 서비스 방향이 옳은지, 어떤 데이터를 우선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보다, 왜인지 많은 기획자들은 ‘대표의 결정을 바꾸는 방법’에 더 많은 에너지를 씁니다.  심지어 직무 경험이 늘어날수록 업무 스킬보다 ‘대표 핸들링’에 더 많은 영향을 받는다고 착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 질문은 주니어일 때나 시니어일 때나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즉, 기획이라는 직무가 가진 독특한 특성이 사람들로 하여금 대표 설득이라는 주제를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만들고, 이것이 마치 기획자의 능력을 증명하는 방식처럼 오해되곤 합니다. 하지만 이 질문이 반복해서 등장한다는 사실 자체가 기획자가 자신의 역할에 대해 얼마나 혼란을 겪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지표이기도 합니다.

 

1-2. “대표를 어떻게 설득할 수 있나요?”라는 질문이 잘못된 이유

표면적으로는 매우 실무적인 질문처럼 보일 수 있지만, “대표를 어떻게 설득할 수 있나요?”라는 질문은 본질적으로 완전히 잘못된 문제 정의입니다. 설득은 상대방의 논리나 판단을 내 쪽으로 끌어오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대표는 회사에서 최종 의사결정권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들의 결정은 기획자가 보기엔 다소 비논리적으로 보일 수 있어도, 그 뒤에는 시장 경험, 감각, 자금 운용 상황, 리스크 감수성, 그리고 본인이 짊어진 책임의 무게 등 복잡한 요소들이 깔려 있습니다.

 

 

기획자는 그 모든 맥락을 온전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무시하고 “내 논리가 더 맞다”는 기준으로 대표를 설득하려 하는 순간, 기획자는 본질적으로 ‘권한 구조를 바꾸려는 행동’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설득을 목표로 삼는 순간 기획자의 시각은 조직 전체가 아니라 ‘대표와의 힘겨루기’로 축소된다는 점입니다. 이 질문이 반복된다는 사실 자체가 많은 기획자들이 문제 해결보다 권한 충돌에 더 매몰되어 있다는 신호이기도 합니다. 결국 설득은 기획자의 역할도 아니고, 성공 확률도 극히 낮은 잘못된 접근입니다.

 

1-3. 기획자 역할에 대한 근본적 오해

대표 설득에 대한 갈망이 반복되는 근본적 이유는 기획자들이 ‘자신의 역할’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많은 주니어 기획자들이 기획자를 마치 회사의 ‘전략가’나 ‘의사결정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비즈니스 방향을 정하고, 대표의 판단을 교정하며, 서비스의 최종 방향성을 이끌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하지만 이는 기획자의 역할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한 오해입니다. 실제로 기획자의 역할은 방향을 결정하는 사람이 아니라, 정해진 방향을 어떻게 현실에서 구현할지를 설계하는 사람입니다. 즉, 기획은 판단의 권한을 행사하는 업무가 아니라, 구조를 만들고 실행력을 확보하는 업무입니다.

 

대표가 비전과 방향성을 제시하면, 기획자는 그것을 사용자 경험과 서비스 로직으로 번역해 ‘되게 만드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많은 기획자가 대표의 판단을 바꾸려는 데 집착하면서 정작 자신이 가장 잘해야 할 “구조화”라는 본질적 기능을 소홀히 합니다. 이 오해가 풀리지 않는 한 기획자는 설득이라는 잘못된 게임판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기획자의 영향력은 ‘대표를 이기는 것’이 아니라 ‘대표의 생각을 실행 가능한 형태로 바꾸는 능력’에서 나옵니다.

2. 대표는 ‘설득의 대상’이 아니라 ‘의사결정자’다

회사의 최종 의사결정권자는 대표입니다. 이는 단순한 직급 문제가 아니라, 법적·경영적·재무적 책임이 모두 대표에게 귀속되기 때문에 형성되는 구조적 위치입니다. 경험 많은 기획자는 이 지점에서 ‘설득’이라는 행위 자체가 얼마나 부적절한지 직감합니다. 대표는 어떤 결정을 하든 그 결과에 대한 모든 책임을 감당해야 하고, 그렇기에 대표의 판단은 단순 논리나 데이터만으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시장 경험, 본능, 리스크 감수력, 자금 상황 등 기획자가 알기 어려운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기획자가 대표의 판단을 바꾸려 드는 것은 본질적으로 ‘권한을 바꾸려는 시도’와 비슷한 효과를 냅니다. 따라서 기획자는 대표를 설득하려는 대신, 대표가 정한 방향성을 더 정교하게 다듬는 역할을 수행해야 합니다.

 

2-1. 왜 대표는 설득의 대상이 될 수 없는가

대표는 조직에서 단순히 ‘의견을 내는 사람’이 아니라, 회사의 최종적인 책임을 지는 사람입니다. 그 결정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그 결과가 대표의 이름으로 남습니다. 따라서 대표의 판단은 단순히 논리나 데이터만으로 움직이지 않으며, 기획자가 보기엔 모호하거나 비합리적으로 보일 때도 사실은 복합적인 요소가 반영된 결과일 때가 많습니다.

 

대표는 회사의 현금 흐름, 조직 유지 비용, 시장 변화, 투자자와의 관계, 법적 리스크, 사람 관리 등 기획자가 알기 어려운 많은 요소들을 동시에 고려하며 결정을 내립니다. 즉, 기획자가 접근할 수 없는 차원의 계산이 이미 대표의 머릿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셈입니다.

 

 

이런 구조 속에서 기획자가 대표를 “논리적으로 설득”하려고 한다는 것은, 사실상 대표의 판단 체계 자체를 바꾸려는 시도와 비슷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설득 시도는 성공 가능성이 낮고, 성공한다 하더라도 대표 입장에서는 자신의 권한이 침해되는 경험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결국 대표는 설득의 대상이 아니라, 방향성을 제시하는 사람, 그리고 그 방향에 책임을 지는 사람입니다.

 

기획자는 그 방향을 어떻게 실행 가능한 형태로 만들지를 고민해야 하지, 대표의 생각을 바꾸는 데 에너지를 소모할 필요는 없습니다. 대표를 설득하지 못했다고 해서 기획자가 부족한 것이 아니라, 설득하려 한다는 것 자체가 역할의 본질과 맞지 않는 접근입니다.

 

2-2. 대표의 판단 뒤에는 기획자가 보지 못하는 책임의 무게가 있다

대표의 결정은 때때로 직관적이고, 과감하고, 심지어 비합리적으로 보일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항상 기획자가 직접 경험하지 못한 ‘책임의 무게’가 존재합니다. 대표는 잘못된 판단을 하면 회사가 흔들리고, 팀원이 떠나고, 매출이 떨어지고, 투자자가 등을 돌리고, 조직 유지에 직접적 타격을 받습니다. 이 모든 부담이 대표 개인에게 집중적으로 쏠립니다.

 

 

반면 기획자가 실패했을 때의 리스크는 상대적으로 제한적입니다. 물론 기획자도 책임을 지지만, 그 책임은 ‘업무상 책임’이지 ‘존속 책임’은 아닙니다. 그래서 대표와 기획자는 본질적으로 다른 레벨의 무게를 지고 있으며, 이 차이가 판단의 방식과 리스크 감수성의 차이로 나타납니다. 기획자가 보기엔 작은 기능 하나라도, 대표에겐 회사 전체 전략과 리스크 맥락 속에서 해석됩니다. 따라서 대표의 판단이 다르게 보인다고 해서 그것이 비논리적이라고 단정지을 수 없습니다. 기획자가 아는 정보와 대표가 보는 정보의 스케일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결국 기획자가 대표를 설득하기 어렵고 해서도 안 되는 이유는, 대표의 판단이 기획자의 논리보다 우월해서가 아니라, 대표가 지는 책임의 범위가 기획자보다 훨씬 넓고 깊기 때문입니다. 이 책임의 비대칭을 이해하는 순간, 기획자는 대표의 결정을 바꾸려 하기보다 그 결정이 현실에서 가장 잘 작동하도록 구조화하고 보완하는 데 집중하게 됩니다.

 

2-3. ‘누가 맞는가’가 아니라 ‘누가 책임지는가’의 문제

기획자들이 대표와 의견 충돌을 겪을 때 가장 흔히 빠지는 함정은 ‘누가 더 옳은가’를 기준으로 논의를 전개하려 한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조직은 옳은 사람의 의견으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조직은 책임지는 사람의 결정으로 움직입니다. 대표는 회사 전체의 방향을 책임지기 때문에, 방향과 전략에 대한 최종 판단권을 갖습니다. 반대로 기획자는 기능과 로직을 구현하고 실행 구조를 만드는 역할을 갖습니다. 즉, 기획자는 판단의 정답을 내는 사람이 아니라, 결정된 방향을 현실에서 작동하도록 만드는 사람입니다.

 

이 구조를 이해하지 못한 채 대표에게 “이건 틀렸다”, “이 방향이 더 맞다”고 주장하는 순간, 기획자는 역할을 벗어나 ‘판단권 충돌’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리고 이 충돌은 대부분 기획자에게 불리하게 작동합니다. 조직 구조를 정확히 이해하는 기획자는 ‘정답을 주장하려는 태도’ 대신 ‘결정권자의 판단을 더 안전하게 구현하는 방식’을 고민합니다.

 

그 과정에서 더 효율적인 대안을 제시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설득이 아니라 보완입니다. 즉, 중요한 것은 기획자가 옳은가 그른가가 아니라, 그 결정의 무게를 누가 지는가의 문제입니다. 이 사실을 이해하는 순간, 기획자 스스로도 훨씬 효율적인 일 방식과 더 성숙한 기획자로서의 사고방식을 갖게 됩니다.

 

왜 기획자는 대표를 설득하려 해선 안 되는가? (2)편에서 계속...


온라인 공간에서 야메군이란 닉네임으로 활동 중인 25년 차 서비스 기획자. 네이버 웹/모바일 기획자 커뮤니티 웹(WWW)을 만드는 사람들에서 운영진으로 활동했으며, 딴지일보를 시작으로 아이러브스쿨, 메가엔터프라이즈, 짱공유닷컴, YES24를 거쳐 IT 원천기술 연구소 Valhalla Lab에서 Pattern recognition과 Machine learning 기반의 Natural language processing 기술의 상업적 이용방법에 대한 연구. 최근 스타트업계로 이직, 반려동물과 온라인 피트니스 분야를 경험했고 자율주행 도메인을 거쳐 현재 SaaS 기반 Monitoring 도메인에서 유일한 기획자로 재직 중. 2016년 7월, 웹/모바일 기획자의 업무능력 향상을 위한 서적 “처음부터 다시 배우는 웹 기획”(정재용, 최준호, 조영수 공저) 출간. 2008년부터 약 15년간 서비스기획자의 성장을 위한 온/오프 강의를 통해 후배 기획자를 양성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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